청명에 죽으나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 한식에 죽으나
  • 이몽룡 스카이라이프 전 사장
  • 승인 2016.11.22 23: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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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는 영광·권세의 자리가 아니다<5-1>
이몽룡 스카이라이프 전 사장

수익보다 비용이 더 많이 들어가는 구조, 상품을 팔면 팔수록 손해가 나는 구조였다. 특히 Biz라고 불리는 저가 상품의 경우, 가입한 지 24개월이 지나야  손익분기점을 넘어서는데 대부분이 그 전에 해지가 됐다. 신규가입 때 들어가는 유치수수료와 설치비용 등이 그대로 회 사의 손해가 되는 구조였다. 경영본부장을 불렀다.

닷새의 말미를 줄 테니 수익과 비용통계가 정확히 맞는 지 알 아 봐 주세요. 닷새 뒤, 경영본부장이 고개를 수그리고 나타났다. 통계는 맞습니다. 긴급 임원회의를 소집해 주세요. 임원들에게 내용을 간추려 설명했다. 유감스럽지만 이대로 가다간 회사가 망하게 생겼습니다.

외부에서의 시각이 아니라 자체 분석에서도 그렇게 나왔습니다. 이 순간부터 우리 회사의 방향을 크게 바꾸겠습니다. HD로 올인 하겠습니다. 이와 동시에 고품질 고가 정책을 쓰 겠습니다.

싼 상품은 못 팔게 하십시오. 
멀고도 험한 길이 될 겁니다. 그러나, 죽을 때 죽더라도 해 보고 난 뒤 죽읍시다.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데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까?

임원들 일부는 공감은 하면서도 뭔가 갸우뚱한 표정을 지었다. 갸우뚱한 표정은 곧 현실로 나타났다. 팀장 회의와 소그룹 미팅을 통해 회사의 방침을 설명했지만 쉽게 납득이 안 되는 모양새였다. 특히 마케팅본부의 저항이 거셌다.

팍팍한 유료방송시장에서 저가상품으로 케이블과 그나마 경 쟁을 해 왔는데 주력상품을 못 팔게 하다니…. 유통망 대부분이 가입자 유치수수료로 운영을 해오고 있는 데…. 똥, 오줌 못 가리는 꺼벙한 사장이 와서 진짜 회사 말아 먹는 것은 아닌지, 현장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수군거림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특히 지방 유통망대표들의 저항이 거셌다.

가뜩이나 사정이 안 좋은데 이젠 강제로 문 닫게 됐다며 불만 을 터뜨렸다. 급기야 일부 유통망대표들이 가입자 모집을 중단하기 시작했 다. 신규 가입자 수가 눈에 띄게 줄어 들었다. 이쯤 해서 항복 하라는 신호였다. 유통망대표들이 다시 목청 높은 대표자를 뽑아 회사로 몰려왔 다. 좋은 말로 얘기 할 때 저가 상품을 다시 팔게 하라는 시위였다.

목청을 한창 돋운 유통망대표들이 세 번째 몰려 올 때 마케팅본부장을 불렀다. 유통망대표들이 한 번 만 더 오면 마케팅본부장 인사조치 하 겠습니다.

마케팅본부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건 회사 전체의 운명이 걸린 문제입니다. 마케팅본부에서 유통망대표들을 잘 설득해 주십시오. 마케팅본부장의 얼굴이 뻘겋게 돼 나간 뒤에도 유통망대표들 의 물건 안 내놓기는 한 달이 넘도록 계속됐다.

그래 청명에 죽으나, 한식에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다. 여기서 물러서면 당분간은 살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죽는 길로 갈 수는 없다.

서서히 죽는 길로 그냥 넋없이 걸어 갈 수 는 없다. 유통망이 마비됐다. 회사가 휘청거렸다.

직원들도 여기저기 서 웅성거렸다. 그러나 여기서 밀리면 정말 끝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꺼벙이 사장의 단호한 의지를 읽었는지, 아니면 이대로 가다 간 회사나 유통망 모두가 망한다고 생각했는지, 가입자 유치 활동은 두 달 만에 재개 됐다. 한 달에 3천원, 4천원에 불과했던 저가 상품은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이 조치로 전체 가입자의 4분의 1인 50만 명이 뚝 떨 어져 나갔다. 가입자를 한 명이라도 더 늘려야 하는 상황에서 스스로 극약처방을 내린 셈이었다. 살과 팔이 떨어져 나가는 아픔은 계속됐다.

환부를 도려낸 외과수술이 성공할 지, 아니면 환자가 아예 사 망할 지, 숨 조이는 날들이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비틀거리면서도 스카이라이프 함선은 ‘HD 명품 브랜 드’라는 항구로 서서히 방향을 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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