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정도(山精圖) - 박노수
산정도(山精圖) - 박노수
  • 고도욱
  • 승인 2017.01.06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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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벌거벗은채 말을 타고 험난한 산을 거슬러오르는 것

 화폭의 전면(全面)을 메우고 있는 것은 거대한 암석의 산이다. 우뚝 선 산은 굳건하고 장엄하게 보이면서도, 젖은 붓놀림으로 흐릿하게 그려져 마치 폭포물이 쏟아져내리듯 율동감을 준다. 돌 무더기 위로 부옇게 부서져내리는 연노랑색 달빛은 청록색 풀무리와 은은히 뒤얽혀있고, 화폭의 우측 상단 끄트머리에는 작은 초승달 한 줌이 고요히 떠있다. 이 거대한 자연과 마주하고 있는 것은 푸른 말 한 필이다. 선명한 청색으로 칠해진 말의 탄탄한 몸뚱이와 포효하듯 치켜든 머리는 늠름하면서도 속세의 존재가 아닌양 신령하다. 말 위에는 벌거벗은 여인 한 명이 올라타있다. 여인은 젖가슴을 드러낸 채 풀어헤친 머리를 휘날리며 앉아있는데, 자신의 벗은 몸뚱이는 관심하지 않는듯 보인다. 부릅 뜬 눈은 그저 전방만을 응시하고 있다. 여인은 말에 올라탄 채 연신 채찍질을 매기며 계속 달려나갈 것만 같다.

앞의 산등성이는 말을 타고 오르기엔 너무나 가파르게 보인다. 재미있는 것은 말과 여인의 시선이 향하는 방향이다. 말은 꼿꼿하게 고개를 치켜든채 높은 하늘만을 바라본다. 반면 여인의 시선은 반대로 슬쩍 아래로 내리깔린 채 발치의 땅을 노려본다. 결과적으로 둘 모두 정작 눈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장애물, 석산(石山)은 아랑곳없는 태도라는 것이다. 이러한 구도는 우리의 삶을 상기시킨다. 인간은 현실(땅)에 발을 디딘 채 이상(하늘)을 쫓으며 살아가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넘을 수 없을 법한 수많은 고난과 장애물(석산)에 가로막힌다. 하늘에 떠 있는 금빛 달은 너무나도 까마득해서 산의 꼭대기에 올라서야만 가까워 질 수 있을 것이며, 정상에 오른들 손에 넣을 수 있을 리 없다. 달은 산 전체에 희미한 금빛을 드리우고 있는데, 이는 플라톤(Plato)의 이데아론 중 동굴의 비유를 상기시킨다. 현실의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들은 이데아계의 본질에서 생겨난 허상(시뮬라크르)에 지나지 않으며,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본질은 그 너머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산 꼭대기 저편의 달은 산 전면에 드리우는 빛의 근원이라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말 위의 여인이 궁극적으로 이르고자 하는 것은, 달빛(시뮬라크르)이 드리우는 산이 아닌 그 본질인 달(이데아)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인은 목표와의 사이에 놓인 가파른 돌무더기나, 겪게 될 고난에 대한 걱정 따위는 없는듯하다. 그저 말의 목덜미를 꽉 부여잡고 자세는 한껏 낮추어 바람을 거스를 만반의 준비를 갖춘다. 말과 여인 모두 ‘어디까지든 달려주마.’하고 온 몸으로 울부짖는 것처럼 보인다. 석산이 넘어서야 할 존재이든 오르고 정복해야 할 존재이든 망설이지 않겠다는 것이다.

<산정도>가 풍기는 강렬한 색채와 내용은 인상적이다. 그러나 박노수의 중기작품 이후 집중적으로 등장하는 차분한 ‘선비’ 그림들과 비교하자면 이질적이다. 이는 박노수의 다른 작품들 속 인물들이 보이는 초탈한듯한 여유나 홀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조자의 태도와는 거리가 있다. 본 작품이 그려지던 시기, 삼십대 초반의 박노수는 52년 대학을 졸업한 뒤 작가와 교육자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산정도>는 당시 박노수가 품고 있었을 자신감과, 삶에서 지속적으로 갱신해야만 했을 작가로써 살아가리라는 결의를 상상하게 한다.

박노수는 생전 산수화와 여인, 그리고 말 그리기를 좋아했다. 말이라는 동물은 끊임없이 앞을 향해 달려나가는 성질 덕에 인간에게 오랜 시간 사랑받아 왔다. 질주가 품고 있는 생명감은 곧 말의 존재의의를 확인시켜주는 것이기도 하다. 박노수가 산수화 속 초연한 선비의 모습을 통해 추구하는 궁극적 삶의 모습을 표현했다면, 말은 그에 다다르기까지 제쳐나가야 할 부단한 ‘현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백조가 수면에 고고히 떠있기 위해 보이지 않는 수백 번의 발놀림이 필요하듯 말이다. <산정도>는 이상과 현실, 삶의 문제를 되돌아보게 해준다. 결국 삶이란, 벌거벗은채 말을 타고 험난한 산을 거슬러오르는 것처럼 고단한 투쟁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외부기고는 우리 논조와 다를 수 있으며, http://blog.naver.com/broken888에도 게제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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