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진, 빛과 어둠③] 노량진은 대한민국이다
[노량진, 빛과 어둠③] 노량진은 대한민국이다
  • 유지윤ㆍ서은정ㆍ최은지 기자
  • 승인 2018.08.20 16: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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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살아가게 해 주세요”... '평범한 삶' 향한 '도전'
늦깍이 공시생에 수능 포기한 '공딩족'도 늘어
‘기승전 공무원’ 권하는 사회, "청년 취업난으로 발생하는 사회구조적 문제들 많아"

노량진을 보면 대한민국을 볼 수 있다. 대학을 갓 졸업한 20·30 청년들 뿐 아니라 20대 아이돌 가수 출신부터 30대 후반 대기업 과장까지 다양한 연령대와 가지각색의 사연을 안고 사람들은 노량진을 자처한다. 무엇이 우리를 노량진으로 데려가는가. 이들의 사연을 통해 들여다봤다.

◆ “우리, 살아가게 해 주세요”...‘평범한 삶’ 향한 ‘도전’

# “여기 노량진에 오려면 정말 큰 용기가 필요해요. 독기 품고 하루에 열다섯 시간씩 공부하겠다. 나 2년 동안 죽었다. 그냥 ‘평타’ 치는 인생 경쟁률이 100 대 1이에요” - 김유진(28), 9급 일반 행정직 공시생

#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가 노량진에 가서 공무원 준비를 하는 게 비정상적이라는 건 잘 알아요.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엄청 낭비죠. 취직하려면 중소기업은 일자리 많은 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먹고야 살겠죠. 근데 사람이 밥만 먹고 사나요” - 강지민(30세), 4년차 임용고사 준비생

사연은 각기 달랐지만 이들이 원하는 건 단 하나 ‘평범한 삶’이다. 이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 아이를 낳고, 육아를 하고, ‘내 집’을 마련해 근근이라도 생계를 유지해 나갈 수 있길 바란다.

한 공시생이 공무원 학원에서 나와 고시원이 있는 언덕 쪽을 바라보고 있다(하단). '98% 떨어지고 2%만 붙는다'는 공무원 시험은 '101명의 연습생 중 우승자 11명만 데뷔를 할 수 있다'는 MNet 연예방송 '프로듀스 101'(상단)의 경쟁방식과 흡사하다.
한 공시생이 공무원 학원에서 나와 고시원이 있는 언덕 쪽을 바라보고 있다(하단). '98% 떨어지고 2%만 붙는다'는 공무원 시험은 '101명의 연습생 중 우승자 11명만 데뷔를 할 수 있다'는 엠넷 연예방송 '프로듀스 101'(상단)의 경쟁방식이 떠오른다.

“관심 받고 싶었어요. 모두가 우러러보는 화려한 삶을 살고 싶었고요. 저 정말 열심히 살았거든요. 마음 편히 쉬어본 순간들이 손에 꼽을 거예요. 그래서 뭐라도 될 줄 알았죠. 그런데 정말 이제는 평범한 삶을 간절히 원하는... 그러면서도 불안감에 잠도 못자는 그런 인생이 돼 버렸네요.”

‘노량진 고시원 새내기’ 이모씨(27)는 ‘아이돌 출신 9급 공시생’이다. 이 씨는 14살부터 소속사에 연습생으로 들어가 약 5년의 연습생 생활을 거쳐 꿈에 그리던 ‘데뷔’를 하게 됐다. 나름대로 공중파 음악방송, 대학가 축제 등 큰 무대들에 섰지만 무명생활은 이어졌다. 수익도 마이너스였다. 그룹이 해체하고 수십 번의 오디션에 도전했지만, 거듭된 탈락에 결국 꿈을 접고 명문대 실용음악과로 진학했다. 나름 현실과 타협한 길이었으나 미래는 여전히 막막했다.

이 씨는 “망한 딴따라가 뭘 먹고 사나요. 대학만 가면 뭐 길이 보이겠지 했는데 실용음악과 나와서 할 게 없어요. 음악 학원 강사는 언제 잘릴지 모르고요. 시간 강사 뛰어봤자 교수되지 않으면 언제 잘릴지 모르고 월급 한 150 받나. 되게 친했던 가수 선배가 있는데, 그 분이 저한테 뭐라는지 알아요? ‘내가 본 후배 중에 제일 똑똑한 선택했다’고 했어요”라며 웃었다.

이선화 씨(38, 충북)는 나이 서른일곱에 늦깎이 공시생이 됐다. 대기업 대리였던 그녀는 회사의 만류에도 불구, 지난해 사직서를 내고 7급 공무원 시험 준비 중이다. 작년에 딸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 씨는 “위에 부장들이 임원 달고 연봉 1억 찍자마자 잘리는 게 공포스러웠다”며 “작년에 태어난 딸이 대학을 입학하면 난 거의 60이 된다. 계속 일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없었다”라고 말했다.

9급 공무원을 3개월째 준비 중인 서지혜 씨(가명)는 아이를 낳으면서 직장을 그만뒀다. 그녀는 “대기업이 아닌 이상 출산휴가, 육아휴직을 인정해주기 쉽지 않고 공무원은 안정적이라 딱 2년만 참고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며 “아이는 시어머니께 양해를 구해 맡기고 남편과 저는 노량진 학원 가까운 곳으로 이사해 살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동사무소 주무관이 된 강모씨(30)는 이전에 택배 물류센터에서 일했다. 그는 지인에게 “네가 언제까지 그거로 먹고 살 수 있겠냐”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아 노량진에서 공부를 시작해 작년에 합격증을 받았다.

공무원 시험 연령대가 점점 낮아지면서 10대 고등학생 때부터 수능을 포기하고 공무원 준비에 뛰어드는 이른바 '공딩족'도 늘어나고 있었다. 서울 영등포의 한 공립 고등학교에 다니는 임채범 군(19)은 고3이지만 올해 수능을 보지 않고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 임 군은 “경찰이신 아버지는 은퇴한 주변 친구 분들과 다르게 아직도 일을 하고 계신다”며 “다른 직업보다 공무원이 안정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임 군은 “단 한 번의 기회로 대학이 결정되는 수능보다 공무원 시험은 본인이 원하면 1년에 시험을 여러 번 치를 수 있어 마음에 들었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세무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세무공무원이 된 최현영 씨(20)도 수능을 보지 않고 2017년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어머니 주옥순 씨(59)는 “쟤(딸)가 어릴 적부터 꿈이 공무원이라 그랬다. 그래서 고등학교도 특성화로 갔다. 3년 내내 학교에서도 공무원 시험 보는 거를 지지해줬다”고 말했다.

공무원을 준비하는 학생들은 가족의 기대 속에서 경쟁과 자기단련에 젊음을 바치며 공부에 매진한다. 사진=KBS2드라마 '노량진역에는 기차가 서지 않는다' 방송화면 캡쳐
공무원을 준비하는 학생들은 가족의 기대 속에서 경쟁과 자기단련에 젊음을 바치며 공부에 매진한다. 그들은 남들만큼 평범하게 사는 인생을 꿈꾼다. 사진=KBS2드라마 '노량진역에는 기차가 서지 않는다' 방송화면 캡쳐

낮 2시, 노량진 동작경찰서 인근 카페에서 만난 김소희 씨(27)는 4년째 9급 공무원을 준비 중이다. 카페 내부에는 테이블마다 문제집과 공책들이 펼쳐져 있었다. 김 씨는 “안타깝죠. 고3때도 이렇게는 안 살았는데. 여기 있는 사람들한테 여건이 잘 주어져서 공무원 준비 대신에 다른 일에 매진할 수 있었다면 아마 노벨상 수상자도 여럿 나왔을 거예요”라며 웃었다.

김 씨는 “인서울 밑바닥이나 저 같은 지방대 애들만 9급 준비하는 줄 알았는데. 이름 대면 알만한 대학 애들이 점점 늘어나요. 심지어는 가끔 내로라하는 명문대 애들까지 보여요”라고 덧붙였다.

지난 11일 편의점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있던 7년차 소방 공시생 손은태 씨(30)는 “멍청한 것도 아니고. 길이 이것밖에 없으니까 하고 있는 건데. 경쟁과 자기단련에 젊음을 바치면서 공부해도 시험에 떨어질 때마다 ‘싸구려’ ‘헐값’ ‘루저’ 취급으로 전락하는 게 20·30대 공시생의 현실"이라고 말했다.

◆ ‘기승전 공무원’ 권하는 사회

전문가들은 ‘너도나도 공무원 시험에 도전하는 현상’은 사회구조적으로 불가피한 현상이라고 말한다.

공무원 열풍의 자화상을 그려낸 책 ‘대통령을 꿈꾸는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의 저자 오찬호씨는 “노량진이란 공간을 보면 한국의 노동시장 구조가 나타난다”면서 “고용안정성, 연금 등을 이유로 청년들을 공무원에 도전하도록 만드는 사회구조가 잘못된 것이다”고 말했다.

오 씨는 “지방대가 가지는 학력차별, 부당한 월급과 노동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노동자, 고용불안 등 공무원을 제외하고서는 ‘할 일’ 없는 사회 구조 안에서 청년들은 공시생이라도 돼서 아등바등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오늘도 노량진역 2번 출구 앞 횡단보도는 북적거린다. 안정된 직업 '공무원'이 되고자 노량진을 찾는 청년들의 모습은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사진=목요기획 다큐멘터리 '청년, 진짜이야기 1부. 컵밥과 삼각김밥' 방송화면 캡쳐
오늘도 노량진역 2번 출구 앞 횡단보도는 북적거린다. 안정된 직업 '공무원'이 되고자 노량진을 찾는 청년들의 모습은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사진=목요기획 다큐멘터리 '청년, 진짜이야기 1부. 컵밥과 삼각김밥' 방송화면 캡쳐

김영민 청년유니온 사무처장은 ‘안정된 직업을 찾아 공무원 시험에 몰리는 현상’과 관련해 “은행, 항공사 등 취업에서 학벌, 학력, 성별 차별이 여전하기 때문에 자신의 ‘스펙’을 낮게 평가하는 청년들이 상대적으로 공정해 보이는 공무원 시험에 쏠린다”고 말했다. 이어 김 사무처장은 “요즘 청년들은 첫 직장으로 임금, 근로시간 모두 따지는 추세인데 현재 노동시장은 일부 일자리를 제외하고는 임금, 근로시간이 좋지 않다”며 “국가와 사회가 청년들의 목소리에 더 귀 기울이고 적절한 일자리 분배, 인재 양성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밝혔다.

유팔무 한림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저출산, N포세대, 비혼, 만혼, 노인부양 등 청년 취업난으로 발생하는 사회구조적 문제들이 많다”며 “청년들을 위해 대학까지 무상교육을 실시하거나 주거보장제도를 제공하는 유럽의 복지제도를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유 교수는 “서울시에서 시작한 ‘청년 취업 할당제’ ‘청년 주거권 보장’ 등을 확대하고, 실업고·전문대 육성 등 4년제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취업할 수 있는 구조를 지속적으로 논의해야 한다”고 했다.

토요일 오전 7시 30분, 무채색 백팩을 매고 있는 30여명의 학생들이 노량진역 2번 출구 앞 횡단보도에 서 있다. 건너편 커핀그루나루를 기점으로 학생들이 세 갈래로 갈라진다. 왼 쪽은 재수, 가운데는 경찰ㆍ소방ㆍ공시, 오른쪽은 임용고사 학원들이 모인 곳이다. 2018년 수능 응시 인원 약 60만명, 2018년 상반기 공무원 시험 응시 인원 약 50만명. 왼쪽 길로 가는 앳된 학생들은 치열한 대입 경쟁을 치루고 몇 년 후, 다시 노량진 횡단보도를 건너 가운데 길로 걸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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