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도의 덫에 빠진 대한민국①] 손자 얼굴 못 보는 부모들
[효도의 덫에 빠진 대한민국①] 손자 얼굴 못 보는 부모들
  • 최은지 기자
  • 승인 2018.07.20 1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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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양에 '경제적 부담' 느끼는 자식들과 '정서적 교류' 원하는 부모... '효도계약서'까지 등장

[톱데일리 최은지 기자] # 지난 19일 저녁 마포노인종합복지관에서 만난 김모씨(62)는 친딸과 지난 2016년 4월 효도계약을 맺었다. 김 씨는 "내가 (안사람과) 이혼하고 얼마 후에 딸이 손자를 낳았어. 나랑 소원한 관계가 돼서 그런지 내게 얼굴도 안 보여주더라고. 나 죽고 나서 증여세 줄 테니 연 8회 방문, 명절은 1번 챙기기 등의 계약조건을 달았지"라고 말했다. 폴더폰으로 찍은 손주사진을 여러 장 보여주던 김 씨는 "부모 자식 간에 계약서 쓰는 게 씁쓸하지만 안부 묻는 사이되는 게 어디냐"고 씁쓸하게 웃었다.

한국의 베이비붐세대는 '효도의 '덫'에 빠졌다. 1995~1963년생 사이에 태어난 이들은 노부모를 부양하고 자식을 챙겨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린다. '결혼 후 부모님을 모시는 게 도리'였던 전통적 가부장제에서 자란 베이비부머들은 그들의 부모에게 받았던 대로 자산과 시간을 자녀에게 투자했다. 그러나 효의 대물림은 없다. 늙어서 자식 덕 볼 생각이 없다 말하지만 '낀 세대'로서의 설움은 가시지 않는다.  

자식들도 할 말은 있다. 취직이 어려워 3포, 4포, 요즘엔 10포까지 해야 한다는 '헬조선'의 밀레니얼세대(1982~2000년생, Millennial Generation)에게 효도는 먼 나라 이야기다. '부모님께 잘해야지'하는 마음을 품지만 당장 먹고살 일부터 막막하다. 이들은 성인이 되고 가정을 꾸려도 여전히 버거운 현실에 부모에게 기대곤 한다. 부모입장에선 제 아무리 힘들어도 내 자식을 품을 수 밖에 없다.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고령화는 두 세대 간의 감정의 골을 더 깊게 만든다. '언제까지 부담을 질 수 없다'는 자녀들의 외면에 부모들은 급기야 효도를 법적으로 약속하는 '효도 계약서'를 내밀고 있다.    

◆ "차라리 효도계약이 편합니다", 세대 간 온도차에 '신(新) 부모 부양' 등장

# "종이 한 장으로 효도를 담보할 수 있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상세한 부양 조건을 제시하며 그 대가로 정기적인 금전을 원한다는 내용만 적으면 돼요. 마지막으로 연대 보증인 하나 세워 안전장치를 하면 바로 완성되죠." - 김성규 법률구조공단 부장(52)

부모는 재산을 담보로 부양을 요구하고 자식은 대가를 기대하며 효도하는 조건부증여 '효도계약서'가 늘어나는 추세다. 사진=SBS 뉴스 비디오머그
부모는 재산을 담보로 부양을 요구하고 자식은 대가를 기대하며 효도하는 조건부증여 '효도계약서'가 늘어나는 추세다. 사진=SBS 뉴스 비디오머그

'효도계약'은 지난 2016년 말부터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다. 대법원은 부모 부양을 조건으로 자식이 부양의무를 충실히 이행하지 않았다면 증여받은 재산을 반환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린 뒤 부터다. 유교문화의 아름다운 덕목이자 윤리였던 효(孝)가 법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효도'에 대한 견해차는 분명하다. 지난해 4월 27일 발간된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보고서 '효도계약과 불효자 방지 법안에 대한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의 태도'에 따르면, 대학생 210명, 부모 198명에게 '실제 효도계약을 할 경우 포함될 수 있는 조건'을 물은 결과 부모는 '정서적 지지'를, 자식은 '경제적 지원'을 효도의 1순위로 생각했다. 

부모들이 바란 '정서적 지지'의 내용은 ▲방문 및 안부 전화 ▲가족여행 및 기념일에 함께 식사 ▲부모와 자주 대화 ▲집안일을 함께 의논하고 결정 등이다. 연구진은 "부모 세대의 경우 아직 전통적인 효와 부양에 대한 기대치가 높은 반면, 성인 자녀 세대는 기능적 측면의 수동적이고 조건적인 부양을 선호하고 있다"고 말했다. 

숙명여대에서 전통문화예술을 가르치는 전모(61) 교수는 "베이비붐세대는 6·25전쟁 후 경제가 한참 성장하던 시기에 학교를 졸업해 취직환경이 아주 좋았지만 현재 밀레니엄세대는 취업난으로 경제적 자립이 어려운 상태”라고 말했다. 이어 전 교수는 "효, 예절 등 과거의 가치관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자란 베이비붐세대는 성인이 된 자녀에게 정서적 지지를 기대했을 것"이라며 "금전적 제공이 효도라고 생각하는 밀레니엄세대와 충돌하는 건 예견된 일이다"고 말했다.

효도를 놓고 발생하는 법적분쟁은 날로 증가하고 있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에 따르면 부양 관련 법률상담 건수는 2010년 60건에서 2013년 134건으로 2배 이상 늘었고 지난해엔 183건에 달했다. 부모가 재산을 조건으로 내놓았음에도 부양하지 않으려는 자식과의 다툼과 갈등이 주된 원인이다.

지난해 6월20일 방송된 PD수첩에선 부양 전쟁, 효도계약서의 문제점을 다뤘다. 100세 시대가 되면서 부양가족의 책임과 미분양 문제 등 노인분양과 부모분양 문제는 심각한 사회문제가 됐다. 이 과정에서 가족 간 소송이 늘어나고 효도계약서를 써야하는 시대에 도달했다. 사진=PD수첩 화면
지난해 6월20일 방송된 PD수첩에선 부양 전쟁, 효도계약서의 문제점을 다뤘다. 100세 시대가 되면서 부양가족의 책임과 미분양 문제 등 노인분양과 부모분양 문제는 심각한 사회문제가 됐다.  사진=PD수첩 화면

효도계약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있다. 박 모씨(34)는 4년 전 부모님으로부터 1억원대 부동산을 담보로 매달 약 100만원을 받는 조건으로 '효도계약'을 체결했다. 박 씨는 "돈만 바라고 효도하는 건 아니다. 부모 부양문제로 가족 갈등을 겪는 경우를 주위에서 많이 보면서 안 되겠다 싶어 (효도계약을) 결단했다"며 "이전엔 일 핑계, 아이 문제 등 갖은 변명 대며 1달에 1번도 못 찾아뵀는데 이젠 의무적으로 매주 주말마다 찾아봬서 가족 관계도 훨씬 좋아졌다"고 말했다.

행복한가족만들기연구소 관계자는 지난 19일 "긴 노후를 살아가면서 자녀 관계도 유지하고 동시에 나의 노후를 맡길 수 있는 일종의 보험 같은 효도계약서에 부모들이 대비하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상인 것 같다"면서도 "밀레니얼세대와 효도에 대한 의견차를 줄이기 위해 소통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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