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보는 경제] 광해가 말하길 "부끄러운 줄 아시오!"
[영화로 보는 경제] 광해가 말하길 "부끄러운 줄 아시오!"
  • 김성화 기자
  • 승인 2020.11.13 06: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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對중 조공 체제, 오히려 중국이 부담스러워 한 이유?
‘사대자소(事大字小)’ 기반, 동아시아 전통적 무역 행태
일본도 조선에 '조공'…"내적 자율성을 전제한 제3의 질서" 방식
광해(2012)
감독: 주창민
출연: 이병헌(광해/하선), 류승룡(허균), 한효주(중전), 김인권(도부장), 장광(조내관), 심은경(사월이)
별점: ★★★☆ - 이병헌이 아니었다면 오그라들 장면이 군데군데 - 

톱데일리 김성화 기자 = 무겁게 숙인 머리는 나를 향한 것이 아니다. 내 뒤에 보이지 않는 명(明)을 향한 것이다. 가슴이 갑갑해진다. 그들은 누구를 위해 이 나라의 관리란 이름으로 군림하는가. “적당히들 하시오, 적당히들!” 듣다 못해 한 마디 내뱉는다. “전하.” 그들은 아랑곶 하지 않고 자신들의 주장을 내세우려 한다. “부끄러운 줄 아시오!” 결국 참지 못하고 화를 내고야 만다.

영화 ‘광해’를 본 사람들이라면 가장 감정이 차오르는 장면이 아닐까 합니다. 이 장면은 명나라의 요청에 따라 군사와 조공을 받치려는 장면입니다. 궁녀와 모시의 일종인 황세저, 백세저, 채단, 초피 등을 보내려 합니다. 조선이 있을 수 있는 게 마치 명나라 때문이며 그에 대한 보답처럼 여겨집니다.

조공은 정말 명나라에 대한 보답 차원이었을까요? 중국의 국가들은 주변 국가들에게 왜 조공을 요구했을까요?

극적인 효과를 염두에 둔 이유겠지만 조공은 영화에서처럼 굴욕적인 건 아니었습니다. 조공의 시작은 중국의 봉건제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서강대학교 현대정치연구소의 ‘유교적 국제질서의 이념과 그 현대적 함의’를 보면 과거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이른바 ‘사대자소(事大字小)’와 ‘책봉(冊封)’, ‘조공(朝貢)’ 체제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사대자소론은 대국인 중국을 섬기고 소국은 돌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를 의례(儀禮) 형태로 구체화한 게 책봉과 조공입니다. 중국 주나라의 봉건제는 중앙의 천자와 주변 제후들로 구성돼 있고 조공 제도는 제후들이 정기적으로 천자를 찾아뵈며(조근朝覲) 지방 특산물을 바치도록(입공入貢) 한데서 유래합니다. 주나라 때 제후를 임명하던 분봉(分封)이 주변 국가들과는 책봉이 됩니다.

주나라 분봉의 봉건적 성격은 주변 국가들에도 적용됩니다. 각 제후의 자치권을 인정하던 봉건제처럼 조공의 형태를 취하면서 주변국의 통치자를 승인새 양국 간 위계와 우호의 외교관계를 형성합니다.

그대들은 누구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가. 사진=다음영화

위계적 관계가 조공에 반영이 됐을까요? 그렇습니다. 조공은 분명 위계적 모습을 띄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생각과는 조금 다릅니다. 주변 국가들은 조공 기회를 되도록 많이 가져가길 원한 반면 오히려 중국 쪽에서 조공을 부담스러워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건국 초기 명나라는 3년에 한 번, 조선은 1년에 세 번을 요청했고 결국 조선의 뜻에 따라 1년에 세 번 공식적인 조공이 이루어 졌습니다.

이런 양상에는 앞서 말한 사대자소 성격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조공이 이루어질 시 중국은 ‘가는 것을 두텁게 하고, 오는 것을 얇게 함’이라는 이념에 따라 받은 조공의 몇 배로 하사품을 내리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당시 조선이 조공으로 바친 말 한필에 명나라는 면 500필을 지급했다고 하는데, 같은 말이 조선에서는 30필 정도였다고 합니다.

조공이 ‘무역’의 성격을 더 강하게 띄고 있는 사례도 있습니다. 태종실록에는 원나라와 전쟁을 치르던 명나라가 급하게 돈을 주고 조선으로부터 말을 구하려 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조선은 명나라가 요구한 말을 만주족으로부터 구입해 되파는 중계무역으로 꽤나 큰 수익을 올렸습니다.

조공은 명나라가 해금(海禁) 정책을 취하면서 더 중요해집니다. 이전 당나라나 송나라도 해금정책을 취했지만 민간무역 창구를 열어놓은 것과 달리, 명나라 홍무제는 해금을 실시하면서 일반인의 해외 왕래를 금지해 민간무역 길이 막힙니다. 조공을 통하지 않고서는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뜻이 됩니다.

우리나라도 태종 때 해금 정책을 취한 적이 있습니다. 또 세종 때에도 밀무역을 금지하면서 바다로 나가려면 7~8척 이상의 배가 모여 나가도록 했습니다.

이런 해금 정책은 초기엔 왜구로부터의 피해를 줄이기 위한 이유였지만 이후에는 조공을 통한 국제 질서 확립을 목표로 한 명나라의 의도가 있었습니다. 또 당나라 시대의 장보고와 이를 이은 왕건의 등장처럼 사무역을 바탕으로 성장한 해상세력이 조공무역 체제를 훼손시킨다는 이유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무역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명나라는 조공사절이 가져온 물화를 공품(貢品)과 사화(私貨)로 구분하고, 사화는 중국 수도나 항구, 변경의 시장에서 거래를 허용했습니다. 또 조선 조공사절단이 여비 보충 명분으로 가져온 인삼, 은 등도 거래가 가능했습니다.

한복은 우리 것. 사진=다음영화

조선과 일본 사이에도 조공이 있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보면 세종 22년 상왜(商倭) 6000명이 내항했다고 하며 세조 때도 비슷한 규모가 기록돼 있습니다. 조선은 일본의 진상품에 하사품을 증여하면서도 사무역을 허용함으로써 왜구 세력을 회유하려 했습니다. 그런 조선의 외교적 동기와 달리 일본은 상업적 이익을 우선시 했고, 조선의 하사품이 적다며 불만을 표하고 하사품을 더 주길 요구하는 일도 빈번했다고 합니다. 조공만으로 이루어지는 무역 규모는 일본을 충족시키기에 부족했고 사무역까지 허용하게 된 이유입니다.

최근 중국이 한복까지 자국 문화라고 우기는 양상이 보입니다. 그건 자신들이 예로부터 대국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하지만 조공 체제만 봐도 그런 태도는 매우 단순하기 그지 없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삼성 한림대학교 정치행정학과 교수는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에서 “동아시아의 전통적 국제관계의 전형은 주권적 평등을 기초로 한 질서가 아닌 공식화된 위계질서를 나타냈지만, 강국과 약소국 사이에 착취적이고 침투적인 식민지 질서도 아니었다”며 “공식적 위계를 전제하되 약소사회의 내적 자율성을 전제한 제3의 질서를 창안한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군림하기 위함이 아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조공 체제는 청나라까지 이어지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배하면서 폐지됩니다. 이는 중국이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대국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는 상징적 사건이기도 합니다. 지금 중국의 태도는 과연 동아시아의 질서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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