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보는 경제] 절대왕정을 말하다① 어른들 밥그릇 싸움에 끼어든 ‘잔다르크’
[영화로 보는 경제] 절대왕정을 말하다① 어른들 밥그릇 싸움에 끼어든 ‘잔다르크’
  • 김성화 기자
  • 승인 2020.12.11 14: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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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프랑스 '백 년 전쟁', 샤를 7세 승리 만들어낸 어린 소녀
토지=권력이었던 봉건사회, 상업화·화폐화 통한 체제 정리
왕-대영주들 사이 영토 확보 싸움…'절대왕정'의 시작
잔 다르크(
The Messenger : The Story of Joan of Arc, Jeanne d'Arc, 1999)
감독: 뤽 베송
출연: 밀라 요보비치(잔), 존 말코비치(샤를 7세), 더스틴 호프만(콘시언스), 페이 더너웨이(욜란드 다라곤), 뱅상 카셀 (질 드 레)
별점: ★★★ - 성령인지 광기인지 -

톱데일리 김성화 기자 = 한 소녀가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있다.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모으고, 시선은 벽에 그어진 십자가를 바라보는 모습이 신실하기 그지없다. 가끔 손을 내밀기도 하거나 고개를 흔들기도 하지만 몇 시간이고 흔들림 없이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그나마 오늘은 나은 편이다. 평소와 같이 이리저리 안절부절못하지 못하며 허공의 누군가와 대화하는 모습은 어쩔 때는 소름이 끼치기도 한다. 프랑스의 왕을 위해 전쟁에서 이기겠다는 저 소녀. 참으로 안타깝다.

프랑스를 구한 영웅 ‘잔 다르크’는 어째서 어린 나이에 전쟁터에 뛰어들 생각을 했을까요? 과연 그 전쟁의 의미를 알고서 뛰어든 것일까요? 그 의미를 알았더라도 자신의 목숨을 걸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영화 잔 다르크의 배경은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있었던 백 년 전쟁을 배경으로 합니다. 잔 다르크는 1429년, 영국군의 포위를 받고 있던 오를레앙에서 첫 전투에 나섭니다. 이어진 잔 다르크의 활약 덕분에 랭스를 탈환한 샤를 7세는 프랑스 왕들의 대관식이 열렸던 랭스 대성당에서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왜 ‘백 년’동안이나 전쟁을 치렀어야 했을까요? 도대체 무슨 사정이 있었기에 백 년 동안 서로에게 칼을 겨눴을까요? 여기에는 어른들의 밥그릇 싸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권력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더 많은 권력을 집중시켜 ‘절대왕정’을 탄생시킨 경제전쟁, 그 배경에 대해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문명화 과정’을 기반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당시 세계관으로 보자면 백 년 전쟁은 내전의 성격도 가지고 있습니다. 사진=두산백과

우선 백 년 전쟁은 영국과 프랑스의 구도로 보지만, 사실 국가 간 전쟁이라기보다는 내전의 성격에 가깝습니다. 영화를 보면 잔 다르크는 부르고뉴 가문에 붙잡힙니다. 즉 영국군과 프랑스의 한 귀족 가문이 결탁을 했다는 것인데, 이 배경이 복잡합니다.

백 년 전쟁의 단초는 11세기 윌리엄 1세의 영국 정복부터 봐야할 거 같습니다. 윌리엄 1세는 노르망디 공국, 파리의 북서쪽 잉글랜드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지역의 공작이었습니다. 출신이 프랑스 쪽이란 거죠.

윌리엄 1세는 왜 영국으로 건너갔을까요? 이는 당시 봉건사회가 요인입니다. 봉건사회는 봉토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입니다. 왕이나 귀족들이 봉토를 통한 계약관계로 신뢰를 유지하는 사회입니다. 달리 말하면 봉토가 많은 왕이나 귀족들이 그만큼 많은 권력을 가질 수 있는 사회였고, 봉토를 확보하는 게 이들에게는 큰 사업이었습니다.

즉 백 년 전쟁은 왕위 계승을 두고 벌인 싸움이기도 하지만, 프랑스 지역을 중심으로 한 대영주들의 영토 확보 전쟁, 상업화와 화폐화가 대영주들에게 힘을 주고 있다지만 아직은 무르익지 않았던 시기 토지를 확보하기 위한 차원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필리프 4세 때 일어난 아비뇽 유수는 이런 전개 과정에서 발생한 갈등을 보여줍니다. 필리프 4세는 즉위 후 즉시 프랑스 통합을 위한 전쟁을 벌였고, 이에 따라 발생한 막대한 비용을 세금, 특히 교회마다 보유한 토지로 재산을 축적하던 성직자들에게 거두려 했습니다. 당시 교황이었던 보니파시오 8세는 이를 금지했고, 교서를 태우며 교황의 지시를 거부한 필리프 4세는 클레멘스 5세를 새로운 교황으로 내세웁니다. 그리고 클레멘스5세는 아비뇽으로 교황청을 옮겨 버립니다.

샤를 7세는 영국과의 평화협정을 두고 잔 다르크와 갈등을 빚었고, 이는 후에 잔 다르크를 매몰차게 내치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사진=다음영화
샤를 7세는 영국과의 평화협정을 두고 잔 다르크와 갈등을 빚었고, 이는 후에 잔 다르크를 매몰차게 내치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사진=다음영화

노르베르트 엘리아스는 대영주들의 싸움이 발생한 계기를, 분권화된 봉건사회가 상업화와 화폐화를 통해 정리된 과정의 연속선상에서 보고 있습니다. 봉건사회에서 권력은 계속해서 나눠줄 새로운 땅을 확보하지 못하면 한계가 있습니다. 이런 한계는 왕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지만 군사력이 취약한 중소 영주들은 더욱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 한계를 가속화 시킨 게 상업화와 화폐화입니다. 상업화는 장원 내 나름 경제 규모를 갖추고 있던 대영주들에게는 세금 확보에 유리했지만, 경제 규모가 작았던 소영주들은 절대적·상대적으로 약해지고 상위 대영주들에게 편입되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상업화와 화폐화는 더 이상 봉토로써 권력을 분산시키고, 계약관계를 통해 권력을 유지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관료를 고용해 돈으로 급여를 주고 대영주를 중심으로 한 중앙 체제를 이룰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이에 따라 “사회적 힘의 증가는 일차적으로 봉토로 떼어주지 않은 가문령이 많은 부유한 대영주”에게서 두드러졌고, “대영주들이 상거래와 화폐거래에서 거두어들이는 기회는…(중략)…군사적 우위를” 가져가게 했습니다.

하지만 각자의 세계를 꾸리고 있던 대영주들 사이에서는 승자독식의 결투가 필요했습니다. 땅이 모두 같은 땅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파리 북서부에 위치한 가스코뉴 지역이나 현재 벨기에에 위치한 플란데런 지역 등 알짜배기 땅에 대한 쟁탈전은 백 년 전쟁의 주요 원인이기도 합니다.

점차 영토를 늘려가고 있던 프랑스 왕과의 전쟁은 대영주들에게 있어 “파리의 왕은 실제로 그리고 다른 영주들의 의식에도 처음에는 그들 중의 한 사람에 불과”했지만 그 싸움에서 패한다면 “영지의 독립성과 재산에 대한 독립적 권한이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리고 그 우려대로 잔 다르크의 등장은 전쟁에서 왕이 승리하는 계기를 만들어 줬습니다. 1475년 헨리 6세가 노르망디와 아키텐 영지 영유권을 포기했고 샤를 7세는 백년 전쟁의 승리자로 기록됩니다. 이어 헨리 6세가 마지막으로 지키고자 했던 칼레 지역도 스페인과 함께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다 패하며 뺏기면서 영국은 완전한 섬나라가 됩니다.

어른들의 싸움은 겉보기처럼 단순하지 않단다. 사진=다음영화
어른들의 싸움은 겉보기처럼 단순하지 않다. 사진=다음영화

잔 다르크는 신의 계시를 받고 왕을 위해 전쟁에 뛰어 들었지만 ‘절대왕정’의 탄생은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엘리아스 노르베르트는 봉건사회는 “폭력의 직접 사용은 자유경쟁 상황에서 필수적인 무기”이지만 이후 “자원의 분배를 결정하는 자는 폭력적 투쟁에서 승자로 나섬으로써 폭력을 독점하고 있는 가문의 사람이나 그 후계자로, 폭력의 직접적 사용이 배제되고 경기의 수단은 세련돼 간다”고 말합니다.

그런 잔 다르크에게 가장 고마워해야 할 건 샤를 7세가 아닌, 절대왕정을 대표하는 ‘태양왕’ 루이 14세일지도 모릅니다. 백 년 전쟁 승리자의 후계자인 루이 14세는 “‘무제한성’이라 일컬어질 정도의 무한한 결정권과 사회적 힘”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는 대영주들을 부상시켰던 상업화와 화폐화의 힘이 이젠 한 명의 왕에게 집중됐음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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