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보는 경제] '마담 퐁파두르' 억울함과 '존 로' 양적완화 사이
[영화로 보는 경제] '마담 퐁파두르' 억울함과 '존 로' 양적완화 사이
  • 김성화 기자
  • 승인 2021.02.10 13: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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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 퐁파두르의 사치가 프랑스 혁명의 원인? 이미 부실했던 왕실 재정
구원자 '존 로', 뱅크 제너럴에 이어 미시시피 주식회사까지
양껏 찍어냈던 은행권, 인플레이션+허구적인 사업…정부 인사들부터 주식 매도
마담 퐁파두르(Jeanne Poisson, Marquise de Pompadour, 2006)감독: 로빈 데이비스출연: 엘렌 드 푸제롤레(퐁파두르), 뱅상 빼레(루이 15세), 로즈마리 라 볼레이(엘리자베트), 샤를로트 드 투르크하임(여왕), 다미엥 쥬이에로(황태자)별점: ★★★☆ - 기대보다 세밀했던 내면 묘사 -
마담 퐁파두르(Jeanne Poisson, Marquise de Pompadour, 2006)감독: 로빈 데이비스출연: 엘렌 드 푸제롤레(퐁파두르), 뱅상 빼레(루이 15세), 로즈마리 라 볼레이(엘리자베트), 샤를로트 드 투르크하임(여왕), 다미엥 쥬이에로(황태자)별점: ★★★☆ - 기대보다 세밀했던 내면 묘사 -

톱데일리 김성화 기자 = 아름다움을 한 몸에 가지고 있다는 건 동경 받을만한 일이다. 그러나 아름다움으로 인해 한 남자의 사랑을 독차지 한다면, 그 남자가 한 나라의 왕이라면 동경이 아닌 질투를 받을만한 일이다. 그런 질투는 소문에 소문을 더하고, 아름다움에 더해 존재하지도 않는 사실을 사실로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그렇다고 어쩌겠는가. 모두가 동경하는 아름다움을 가진 것에 대한 대가인 것을.

루이 15세의 연인이었던 ‘마담 퐁파두르’는 다른 의미로 경국지색이란 말이 어울리는 인물입니다. 그녀에 대한 평가를 보면 귀족이 아닌 부르주아 출신으로 왕의 총애를 받아 사치를 부린다며 비난하는 목소리가 많았습니다. 실제로 그녀는 그림과 도자기,오페라에 관심이 많았고 그녀의 패션은 당대 유행이 되기도 하는 등 셀럽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본명은 잔 앙트와네트 푸아송이며 퐁파두르는 그녀의 작위명입니다. 사진=위키백과
본명은 잔 앙트와네트 푸아송이며 퐁파두르는 그녀의 작위명입니다. 사진=위키백과

하지만 그녀의 사치스러움 때문에 훗날 프랑스 혁명을 겪었다는 건 좀 억울할만 합니다. 우리는 이 시기가 태양왕 루이 14세 직후였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화 ‘마담 퐁파두르’에서 보이듯 루이 15세는 앞선 루이 14세에 이어 전쟁을 끊임없이 벌였습니다. 1733년부터 1738년까지 진행됐던 폴란드 왕위 계승전쟁을 통해 로렌 지방을 프랑스 영토로 편입하는 성과도 있었지만, 곧 이어 1740년부터 1748년까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전쟁과 1756~1764년 사이 7년 전쟁까지 참전하며 막대한 재정을 쏟아 넣었습니다. 7년 전쟁에 개입한 건 마담 퐁파두르의 입김도 있었다고 합니다.

프랑스 왕실 재정이 이렇게 전쟁을 벌일 정도로 좋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폴란드 왕위 계승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721년 프랑스 왕실은 본인들이 지고 있던 채무를 갚을 수 없다고 선언해버립니다. 이런 일이 한 번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1559년부터 1788년까지, 약 230년 동안 11번이나 있었습니다. 기본 재정 기반이 취약했습니다. 거기다 태양왕 시절에 뒤이은 시기인 만큼 왕실 씀씀이도 커졌을 것입니다. 루이 15세 시대는 아니지만 1788년 왕실재정을 보면 수입은 5억300만리브르였지만 지출은 6억3000만리브르였다고 합니다. 1리브르가 약 12~13만원이라고 하니 1년 적자가 15조원에 달하네요.

재정적자를 만회하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세금을 더 걷는 것입니다. 이는 당시 프랑스 국민소득 대비 조세부담율이 30%를 넘어갔고, 특권층은 세금을 내지 않는 가운데 일반시민 부담만 높이는 방법이라 쉽지 않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돈을 빌려줄 수 있는 중앙은행을 설립하는 방법이고 여기서 퐁파두르가 비난을 받는데 책임이 없지 않은 스코틀랜드 출신 ‘존 로’와 ‘미시시피 주식회사’가 등장합니다.

존 로가 가지고 있던 양적완화에 대한 기대감은 당시로서는 너무 무분별한 시도였다. 사진=위키백과
존 로가 가지고 있던 양적완화에 대한 기대감은 당시로서는 너무 무분별한 시도였다. 사진=위키백과

스코틀랜드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을 쳤던 존 로는 루이 15세 시대 섭정을 맡고 있던 필리프 2세를 만납니다. 존 로는 왕실 재정 문제 해결을 위해 금속화폐 대신 발행하는 은행에서 발행한 은행권을 사용하자고 제안합니다. 이를 통해 왕실 인사들이 참여해 1716년 방크 제너럴이 설립되고 왕실에 저금리로 돈을 빌려줍니다. 프랑스 왕실은 모든 세금을 방크 제너럴 은행권으로 납부하라는 칙령까지 내리며 힘을 실어 줍니다. 리브르라는 통화는 이때부터 통용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프랑스 왕실은 여러 차례 채무 불이행을 선언했고, 정부가 돈을 찍어낸다고 해도 신뢰도를 보장하긴 힘들었습니다. 또 당시 금본위제 하에서 은행권을 마구 찍어내는 것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등장한 게 미시시피 회사입니다. 존 로는 1717년 미시시피 회사를 북미 지역을 포함한 프랑스 식민지 무역에 목표를 두고 인수하고 서방회사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식민지에서 부족한 금을 보충하겠다는 것이지요.

프랑스 왕실로서는 존 로가 미시시피 회사 자본금을 국채로 모집하겠다는 제안이 매력적이었습니다. 당시 국채는 상환의무 없이 이자만 지급했기에 부채를 줄이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또 국채를 시장가보다 높은 액면가로 미시시피 회사 주식과 교환해줬으며 정부가 미시시피 회사의 프랑스 해상 상업권과 담배 독점권을 가져갑니다. 여기에 프랑스 왕실이 방크 제너럴을 인수해 왕립은행으로 만들고, 이어 왕립은행과 미시시피 회사를 합병하는 과정이 더 해지면서 미시시피 회사의 가치가 급등합니다.

존 로는 프랑스 왕실 국채 규모에 맞춰 주식을 더 발행했고, 일반 시민들이 이를 구입할 수 있게 은행권도 더 찍어 냈습니다. 시중에 돈이 풀리니 주식 가격은 더 오르게 됩니다. 또 존 로는 대출을 받으려는 사람들에게서 담보로 미시시피 주식을 받아 유통 주식수가 줄어든 점도 거품을 만들었습니다. 1717년 500리브르로 시작한 미시시피 회사 주가는 1720년 1월 1만리브르로 20배가 오릅니다. 존 로 조차 이런 가격 상승에 겁을 먹고 대출금리를 올려 열기를 잠재우려 했습니다.

존 로는 양적완화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시중에 돈이 풀리는 만큼 경기가 좋다는 믿음을 가지고 은행권을 계속해 발행했습니다. 또 여기에는 왕실에서 계속해 은행권을 발행하도록 요구한 점도 있었습니다. 인플레이션은 빚을 지고 있던 프랑스 왕실에 유리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이들은 과도한 인플레이션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었습니다. 남발한 은행권은 물가상승을 불러왔습니다. 이는 현물 가치가 올라가고 지폐로 사용되는 은행권 가치가 하락한다는 얘기입니다. 거기다 금광 개발을 주목적으로 설립된 미시시피 회사는 높은 주가로 만들어진 자본금을 사업에 쓰지 않고 왕실에 빌려주는데 사용했습니다. 회사로서 사업 수익을 기대할 수 없었고 이는 바다 건너 거품을 만들었던 영국 남해회사와 닮아 있습니다.

부자는 망해도 3대는 간다고 하지만, 이들은 3대가 지나기 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지 못했습니다. 사진=다음영화
부자는 망해도 3대는 간다고 하지만, 이들은 3대가 지나기 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지 못했습니다. 사진=다음영화

영국 남해회사도 정부 부채를 떠넘기기 위해 만들어 졌으며, 거품이 꺼지는 과정에서 정부 인사들이 큰 몫을 벌며 무책임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미시시피 회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북미 식민지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미시시피 회사 사업 허구성에 대해 말하고 이 소문이 퍼지며 사람들이 주식 교환을 요구하자 주가는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가장 먼저 나서 주식을 교환한 사람이 모든 사건을 주도한 필리프 2세였습니다. 마담 퐁파두르는 어쩌면 이들을 향한 시선을 돌리기 적당한 인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은행권의 가치가 계속해 떨어지면 은행권을 손에 쥐고 있는 것보다는 현물, 부동산 또는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금이나 은으로 바꾸는 게 유리합니다. 하지만 금본위제를 무시하며 감당할 수 없는 수준까지 은행권을 발행했으니 교환 가능할리가 없었고, 주가는 더 폭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720년 초 1만리브르였던 주가는 여름이 지나기도 전에 3000리브르까지 떨어집니다.

네덜란드의 튤립 거품과 영국의 남해회사 거품, 미시시피 회사 거품 사건은 근대 유럽 3대 거품경제로 불립니다. 미시시피 회사 거품 사건은 프랑스 왕실 재정은 개선했을지 몰라도, 거시적으로는 찰스 P. 킨들버거가 “영원한 도전자”라 말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으로 몰고 갔습니다. 이 사건으로 프랑스는 비옥한 토지와 많은 인구에도 불구하고 금융에 대한 신뢰가 바닥을 치면서 국가적 사업을 위한 자금 동원 방법을 상실합니다. 그 사이 영국이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거듭나는 데 금융의 힘이 절대적이었음을 생각한다면 너무나 뼈아픈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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